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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현의 사회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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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경기도 고택 (남양주 궁집)2022-04-25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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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궁집*

화길옹주에 대한 아버지 영조의 사랑이 가득한 곳

조선 21대 왕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구민화와 결혼할 때,

부마의 간택을 위해서도 영조께서 온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지역적으로도 남양주가 풍수적으로 좋은 땅이어서 선택된 곳이라고...

궁궐을 짓는 목수들을 보내 궁궐에서 쓰던 목재와 자재를 사용해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궁집'이라 명명하게 되었다고...

화길옹주는 영조가 60세 나이에 얻은 막내딸로 영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옹주가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에 빠져 팔순 잔치도 거부했다고...

화길옹주가 12세에 출가하여 죽을 때까지(1765~1772) 살았던 곳이기에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건축물로 당시의 건축기법과 양식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채를 바라보며 왼쪽에 사랑채로 가는 문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입구에서부터 완전히 분리된 구조이다.

남녀의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했던 조선시대 상류사회의 유교적인 관념이 반영된 부분이라 하겠다.

오른쪽에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남자들이 드나드는 사랑채는 담 너머로 볼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밖에서 볼 수 없게 되어있다.

이 또한 조선시대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문 위 중앙에 화살촉 모양이 보인다.

일반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보통 왕궁과 왕릉에 있는 홍살문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집이 평범한 집이 아님을 알리는 것이라 하겠다.

홍살문의 화살촉이 액운을 막는다는 의미로 알고 있는데, 아마 그런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다.

문을 열면 바로 벽을 마주한다.

바로 개방되어 집 안쪽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벽이 차단하고 있다.

안채는 여성들의 공간으로 폐쇄적인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안채로 들어서면 ''자 형태의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북부 산간지역 한옥의 특징으로 추위와 바람을 막는 구조이다.

옹주의 집인데 그렇게 크고 멋지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오히려 소박한 느낌이다.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는 왕족도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가 정해졌다고 한다.

대군은 60, 군과 공주는 50, 옹주는 40칸을 짓도록 규정되어 있었다는 것.

궁집은 본래 40칸의 기와집이었으나 행랑채가 소실되어 현재는 31칸 정도가 남아있다고 한다.

궁집의 규모는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집의 재료를 다듬은 뛰어난 솜씨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궁집의 건축 자재들을 살펴보면,

기단과 계단을 쌓은 돌은 궁궐에서 가져와 일반 집들에 비해 크고 잘 다듬어 반듯하며,

기단이 2단으로 되어 있다.

안채의 주인이 지체 높은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기둥들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기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청마루의 문이 열렸다. 대청마루는 현재의 거실과 같은 곳.

일반 한옥에는 대청마루에 문이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데...

바닥이 나무로 되어 있고,

문 사이로 천장의 대들보도 보인다.

궁집의 목재들을 살펴보면 감탄스럽다.

나무결의 무늬 모습도 나무를 잘라 만들어내는 과정인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다.

궁중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과 좋은 목재 등을 통하여 만들어진 궁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섬세하고 격조 높은 모습이다.

쪽마루를 자세히 보니, 나무의 윗부분에 못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당시의 나무못이다.

쇠못이 아니라 저런 나무못으로 나무들을 연결하여 쪽마루를 이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정교한 기술이 놀랍게 느껴졌다.

긴 시간과 정성으로 지어진 집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겠다.

특이한 문이 보인다. 부엌문이었다.

무쇠솥과 아궁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엌의 환기를 위해 양쪽으로 빗살 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랑채 누마루의 기단석은 장인이 수작업으로 직접 정으로 깎은 것이라고 한다.

기계보다 정교하게 잘 다듬어진 모습에서 궁집의 귀한 가치를 보는 것 같았다.

궁집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한옥과 정원을 만날 수 있다.

무교동집, 용인집, 군산집, 초가집1, 초가집2 등과 마을을 흐르던 개천까지 완벽하게 남아있어 역사의 향기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마을 가운데로 개천이 있다.

지금은 물이 없지만, 물이 흘렀던 시절에는 꽤 운치가 있었겠다 싶다.

개천을 건너게 다리가 놓여있고 석수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순간 조선 궁궐 앞의 금천과 금천교가 오버랩 되면서, 궁궐처럼 신성한 곳으로 가기 전 삿된 기운을 쫓아낸다는 궁궐의 금천과 금천교의 의미가 떠올랐다.

궁집이 궁궐과 연결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인집은 일제 강점기 세도가인 송병준이 용인에 지은 99칸 별장의 일부를 옮겨와 복원한 집이다.

낙성대에 있던 강감찬 장군 유적지의 사당을 이전 복원한 집.

군산집은 군산에 있던 순조의 큰며느리인 조대비 친정집을 이전 복원한 집으로, 두 채였던 한옥을 한 채로 연결하여 복원했다고 한다.

원래 궁집 일대는 개인 사유지였다고 한다.

이곳을 마지막까지 소유 관리했던 부부가 있다.

남편 화가 권옥연과 부인 무대미술가 이병덕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으로 복합문화공간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한옥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한옥을 구입해 옮겨 복원했다고 하는데, 원래 한옥이 있었던 곳의 지역명으로 그 집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부부가 문화재단을 설립해 관리해오다, 남양주시와 기부채납 협약을 맺으며 2019년 남양주시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고 한다.

남양주시는 기부한 이들의 뜻을 기리고, 궁집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하여 도심 속 역사 문화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보수정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후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할 예정이라고 한다.

*남양주 궁집**남양주 궁집*

화길옹주에 대한 아버지 영조의 사랑이 가득한 곳

조선 21대 왕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구민화와 결혼할 때,

부마의 간택을 위해서도 영조께서 온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지역적으로도 남양주가 풍수적으로 좋은 땅이어서 선택된 곳이라고...

궁궐을 짓는 목수들을 보내 궁궐에서 쓰던 목재와 자재를 사용해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궁집'이라 명명하게 되었다고...

화길옹주는 영조가 60세 나이에 얻은 막내딸로 영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옹주가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에 빠져 팔순 잔치도 거부했다고...

화길옹주가 12세에 출가하여 죽을 때까지(1765~1772) 살았던 곳이기에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건축물로 당시의 건축기법과 양식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채를 바라보며 왼쪽에 사랑채로 가는 문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입구에서부터 완전히 분리된 구조이다.

남녀의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했던 조선시대 상류사회의 유교적인 관념이 반영된 부분이라 하겠다.

오른쪽에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남자들이 드나드는 사랑채는 담 너머로 볼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밖에서 볼 수 없게 되어있다.

이 또한 조선시대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문 위 중앙에 화살촉 모양이 보인다.

일반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보통 왕궁과 왕릉에 있는 홍살문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집이 평범한 집이 아님을 알리는 것이라 하겠다.

홍살문의 화살촉이 액운을 막는다는 의미로 알고 있는데, 아마 그런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다.

문을 열면 바로 벽을 마주한다.

바로 개방되어 집 안쪽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벽이 차단하고 있다.

안채는 여성들의 공간으로 폐쇄적인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안채로 들어서면 ''자 형태의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북부 산간지역 한옥의 특징으로 추위와 바람을 막는 구조이다.

옹주의 집인데 그렇게 크고 멋지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오히려 소박한 느낌이다.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는 왕족도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가 정해졌다고 한다.

대군은 60, 군과 공주는 50, 옹주는 40칸을 짓도록 규정되어 있었다는 것.

궁집은 본래 40칸의 기와집이었으나 행랑채가 소실되어 현재는 31칸 정도가 남아있다고 한다.

궁집의 규모는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집의 재료를 다듬은 뛰어난 솜씨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궁집의 건축 자재들을 살펴보면,

기단과 계단을 쌓은 돌은 궁궐에서 가져와 일반 집들에 비해 크고 잘 다듬어 반듯하며,

기단이 2단으로 되어 있다.

안채의 주인이 지체 높은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기둥들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기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청마루의 문이 열렸다. 대청마루는 현재의 거실과 같은 곳.

일반 한옥에는 대청마루에 문이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데...

바닥이 나무로 되어 있고,

문 사이로 천장의 대들보도 보인다.

궁집의 목재들을 살펴보면 감탄스럽다.

나무결의 무늬 모습도 나무를 잘라 만들어내는 과정인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다.

궁중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과 좋은 목재 등을 통하여 만들어진 궁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섬세하고 격조 높은 모습이다.

쪽마루를 자세히 보니, 나무의 윗부분에 못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당시의 나무못이다.

쇠못이 아니라 저런 나무못으로 나무들을 연결하여 쪽마루를 이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정교한 기술이 놀랍게 느껴졌다.

긴 시간과 정성으로 지어진 집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겠다.

특이한 문이 보인다. 부엌문이었다.

무쇠솥과 아궁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엌의 환기를 위해 양쪽으로 빗살 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랑채 누마루의 기단석은 장인이 수작업으로 직접 정으로 깎은 것이라고 한다.

기계보다 정교하게 잘 다듬어진 모습에서 궁집의 귀한 가치를 보는 것 같았다.

궁집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한옥과 정원을 만날 수 있다.

무교동집, 용인집, 군산집, 초가집1, 초가집2 등과 마을을 흐르던 개천까지 완벽하게 남아있어 역사의 향기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마을 가운데로 개천이 있다.

지금은 물이 없지만, 물이 흘렀던 시절에는 꽤 운치가 있었겠다 싶다.

개천을 건너게 다리가 놓여있고 석수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순간 조선 궁궐 앞의 금천과 금천교가 오버랩 되면서, 궁궐처럼 신성한 곳으로 가기 전 삿된 기운을 쫓아낸다는 궁궐의 금천과 금천교의 의미가 떠올랐다.

궁집이 궁궐과 연결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인집은 일제 강점기 세도가인 송병준이 용인에 지은 99칸 별장의 일부를 옮겨와 복원한 집이다.

낙성대에 있던 강감찬 장군 유적지의 사당을 이전 복원한 집.

군산집은 군산에 있던 순조의 큰며느리인 조대비 친정집을 이전 복원한 집으로, 두 채였던 한옥을 한 채로 연결하여 복원했다고 한다.

원래 궁집 일대는 개인 사유지였다고 한다.

이곳을 마지막까지 소유 관리했던 부부가 있다.

남편 화가 권옥연과 부인 무대미술가 이병덕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으로 복합문화공간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한옥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한옥을 구입해 옮겨 복원했다고 하는데, 원래 한옥이 있었던 곳의 지역명으로 그 집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부부가 문화재단을 설립해 관리해오다, 남양주시와 기부채납 협약을 맺으며 2019년 남양주시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고 한다.

남양주시는 기부한 이들의 뜻을 기리고, 궁집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하여 도심 속 역사 문화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보수정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후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할 예정이라고 한다.

화길옹주에 대한 아버지 영조의 사랑이 가득한 곳 조선 21대 왕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구민화와 결혼할 때, 부마의 간택을 위해서도 영조께서 온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지역적으로도 남양주가 풍수적으로 좋은 땅이어서 선택된 곳이라고... 궁궐을 짓는 목수들을 보내 궁궐에서 쓰던 목재와 자재를 사용해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궁집'이라 명명하게 되었다고... 화길옹주는 영조가 60세 나이에 얻은 막내딸로 영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옹주가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에 빠져 팔순 잔치도 거부했다고... 화길옹주가 12세에 출가하여 죽을 때까지(1765~1772) 살았던 곳이기에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건축물로 당시의 건축기법과 양식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채를 바라보며 왼쪽에 사랑채로 가는 문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입구에서부터 완전히 분리된 구조이다. 남녀의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했던 조선시대 상류사회의 유교적인 관념이 반영된 부분이라 하겠다. 오른쪽에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남자들이 드나드는 사랑채는 담 너머로 볼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밖에서 볼 수 없게 되어있다. 이 또한 조선시대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문 위 중앙에 화살촉 모양이 보인다. 일반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보통 왕궁과 왕릉에 있는 홍살문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집이 평범한 집이 아님을 알리는 것이라 하겠다. 홍살문의 화살촉이 액운을 막는다는 의미로 알고 있는데, 아마 그런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다. 문을 열면 바로 벽을 마주한다. 바로 개방되어 집 안쪽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벽이 차단하고 있다. 안채는 여성들의 공간으로 폐쇄적인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안채로 들어서면 'ㅁ'자 형태의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북부 산간지역 한옥의 특징으로 추위와 바람을 막는 구조이다. 옹주의 집인데 그렇게 크고 멋지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오히려 소박한 느낌이다.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는 왕족도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가 정해졌다고 한다. 대군은 60칸, 군과 공주는 50칸, 옹주는 40칸을 짓도록 규정되어 있었다는 것. 궁집은 본래 40칸의 기와집이었으나 행랑채가 소실되어 현재는 31칸 정도가 남아있다고 한다. 궁집의 규모는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집의 재료를 다듬은 뛰어난 솜씨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궁집의 건축 자재들을 살펴보면, 기단과 계단을 쌓은 돌은 궁궐에서 가져와 일반 집들에 비해 크고 잘 다듬어 반듯하며, 기단이 2단으로 되어 있다. 안채의 주인이 지체 높은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기둥들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기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청마루의 문이 열렸다. 대청마루는 현재의 거실과 같은 곳. 일반 한옥에는 대청마루에 문이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데... 바닥이 나무로 되어 있고, 문 사이로 천장의 대들보도 보인다. 궁집의 목재들을 살펴보면 감탄스럽다. 나무결의 무늬 모습도 나무를 잘라 만들어내는 과정인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다. 궁중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과 좋은 목재 등을 통하여 만들어진 궁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섬세하고 격조 높은 모습이다. 쪽마루를 자세히 보니, 나무의 윗부분에 못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당시의 나무못이다. 쇠못이 아니라 저런 나무못으로 나무들을 연결하여 쪽마루를 이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정교한 기술이 놀랍게 느껴졌다. 긴 시간과 정성으로 지어진 집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겠다. 특이한 문이 보인다. 부엌문이었다. 무쇠솥과 아궁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엌의 환기를 위해 양쪽으로 빗살 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랑채 누마루의 기단석은 장인이 수작업으로 직접 정으로 깎은 것이라고 한다. 기계보다 정교하게 잘 다듬어진 모습에서 궁집의 귀한 가치를 보는 것 같았다. 궁집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한옥과 정원을 만날 수 있다. 무교동집, 용인집, 군산집, 초가집1, 초가집2 등과 마을을 흐르던 개천까지 완벽하게 남아있어 역사의 향기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마을 가운데로 개천이 있다. 지금은 물이 없지만, 물이 흘렀던 시절에는 꽤 운치가 있었겠다 싶다. 개천을 건너게 다리가 놓여있고 석수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순간 조선 궁궐 앞의 금천과 금천교가 오버랩 되면서, 궁궐처럼 신성한 곳으로 가기 전 삿된 기운을 쫓아낸다는 궁궐의 금천과 금천교의 의미가 떠올랐다. 궁집이 궁궐과 연결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인집은 일제 강점기 세도가인 송병준이 용인에 지은 99칸 별장의 일부를 옮겨와 복원한 집이다. 낙성대에 있던 강감찬 장군 유적지의 사당을 이전 복원한 집. ​군산집은 군산에 있던 순조의 큰며느리인 조대비 친정집을 이전 복원한 집으로, 두 채였던 한옥을 한 채로 연결하여 복원했다고 한다. 원래 궁집 일대는 개인 사유지였다고 한다. 이곳을 마지막까지 소유 관리했던 부부가 있다. 남편 화가 권옥연과 부인 무대미술가 이병덕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으로 복합문화공간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한옥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한옥을 구입해 옮겨 복원했다고 하는데, 원래 한옥이 있었던 곳의 지역명으로 그 집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부부가 문화재단을 설립해 관리해오다, 남양주시와 기부채납 협약을 맺으며 2019년 남양주시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고 한다.

남양주시는 기부한 이들의 뜻을 기리고, 궁집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하여 도심 속 역사 문화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보수정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후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할 예정이라고 한다.mb-file.php?path=2022%2F04%2F25%2FF2039_%EB%82%A8%EC%96%91%EC%A3%BC%EA%B6%81%EC%A7%91-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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