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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의 ‘조선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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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안성 죽주산성2022-04-23 10:09
작성자

죽주산성(竹州山城)

경기도 기념물 제69

시대 삼국시대

소재지;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산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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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竹州는 고려시대 죽산지역의 지명으로 이곳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영남길 교통의 요지이다.

이 성은 죽주성 또는 매성으로 불렸으며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곳인데,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하여 몽고침략 때와 임진왜란 때 다시 쌓았다. 성벽은 내성,중성,외성의 3중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외성만이 원래의 성벽이 남아 있고 내성과 중성은 많은 보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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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성 역시 성벽의 하부구조는 아직도 삼국시대 모습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5년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 성을 모방하여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남쪽 성벽 의 동쪽과 서쪽의 치성(雉城)부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성 바깥에는 도랑(마른 해자,외항)의 흔적이 있으며 ,북문 옆에는 네모진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고종 23(1236) 몽고군이 이곳 죽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강요하면서 공격하였으나 송문주장군이 막아냈다. 이때 성을 지킨 죽주방호별감 송문주장군은 일찍이 구주성(龜州城) 싸움에서 몽고군의 공격법을 알고 대비하였기에 이길 수 있었고, 이에 백성들은 그를 신명(神明)’이라 불렀다. 성안에는 송문주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채제공이 쓴 송장군묘비명에는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둘러싸고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장군은멀리서 왔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가! 삼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 하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고, 이에 크게 놀라 적이 물러가니 뒤 쫒아 무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의 평탄지에 대한 발굴조사결과 신라시대 집수시설 6기와 조선시대 집수 시설 2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죽주산성이 예로부터 물이 풍부한 성이었으며 이러한 기록이 진실임을 밝혀주는 증거가 된다.

 

신출귀몰한 장군 신명(神明)송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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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18(1231) 몽고가 처음으로 고려를 침입하였습니다. 이후 4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려 고려를 유린하였습니다. 전란으로 인한 경기지역의 피해는 매우 극심했는데, 안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렇듯 몽고의 침입은 참혹했지만 고려의 항쟁도 치열하였습니다.

최씨 무신정권은 몽고군이 지나가는 주요 길목에 방호별감을 파견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산서에 들어가 항전하도록 독려 하였습니다. 안성의 죽주산성 전투는 고종23(1236) 3차 침입때의 일입니다. 죽주는 개경에서 충주를 거쳐 경상도 지방으로 내려가는 영남대로에 있는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최씨 무신정권도 죽주의 중요성 때문에 몽고의 1차 침입때 박서 장군이 이끌었던 귀주성 전투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경험이 있는 송문주 장군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는 몽고군이 죽주근처에 이르자 백성들을 죽주산성에 들어가게 한 뒤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전투에 대하여 [고려사절요]에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몽고 군사가 죽주에 이르러 항복하라고 타이르므로 성중의 군사가 출격하여 보냈더니,다시 와서 포를 가지고 성의 사면을 공격하여 성문이 포에 맞아 무너졌다. 성중에서도 포로써 그들을 역공격하니 몽고 군사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또 인유, 소나무 홰,쑥 풀등을 갖추어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중 군사가 일시에 문을 열고 출전하니 몽고 군사의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몽고 군사가 온갖 방법으로 공격했는데 무릇 15일 동안에 끝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공격에 사용하던 병기들을 불살라 버리고 갔다.”

송문주 장군은 귀주성 전투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경험을 살려 몽고의 공격방법을 예측하여 방어함으로써 그들의 공격을 무력화시켰습니다. 휘하 군사들과 백성들에게 오늘은 적이 반드시 아무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아무 방법으로 그에 응해야 한다.” 고 미리 공격계획과 방어방법을 알려주었고 적이 오면 과연 그 말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신명(神明)이라 하였습니다.

 

송문주 장군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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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당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정조때 문신이자 수원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였던 체제공 선생이 쓴 번암집(樊巖集;1791)의 송장군묘비명으로 추측컨대 송장군 사후 (1200년대 후반) 처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송장군묘비명에는 사당을 만든 지 5~6백년이 지나서 대들보가 부러지고 계단이 무너져 있는 것을 1767년 죽산부사 유언지가 옛적과 같이 고쳤다고 기록이 있다.

1933825일 동아일보에는 후대사람들이 송장군의 충열을 사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수 백마지기의 위토(位土;제사와 관련된 일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장만한 토지)까지 장만하였으며 30년 전까지만 해도 죽산면에서는 매년 음력 99일 송문주 장군을 기리는 제향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원래는 1칸짜리 건물이었으나 1978년 정면 3칸 측면 1칸의 현재의 건무로 중수하였고 구조는 맞배지붕 익공집 형식이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신도(神道;신이 다니는 길)로 본래 일반인들이 통행하는 길은 아니지만 현재 유일한 통행로로 이용되고 있다

 

오누이가 힘겨루기로 쌓은 죽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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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일찍이 과부가 된 홀어머니 밑에 두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남매는 성장해 가면서 보통 사람에게 찾아 볼 수 없는 비범함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있는 그들을 사람들은 장사 남매라고 불렀습니다. 남동생이 열여섯 되던 해, 나라에 큰 전쟁이 나서 전쟁터로 나갔으나 패하고 도망쳐 왔습니다. 이를 용납 할 수 없었던 누나는 자결을 권했습니다. 동생은 후일에 위해 집으로 돌아온 자신의 행동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결을 위하여 칼을 빼어들었습니다. 누나는 이것이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용서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내기를 해서 이기면 살고 지면 죽을 것이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일주일 동안 누나는 죽산에 산성을 쌓고 남동생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끌고 임금님이 계시는 도성까지 다녀오는 것이었습니다. 내기를 시작하고 여섯째 되던 날 누나는 벌써 성을 거의 다 쌓고 서남쪽으로 여섯 자 정도만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어머니는 대를 이을 아들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뜨거운 팥죽을 쑤어 딸에게 먹여 시간을 지연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뜨거운 팥죽을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팥죽을 먹으며 천천히 성을 쌓는 사이에 동생이 돌아왔고, 내기에 진 누나는 약속대로 자결하였습니다. 누나가 자결하자마자 몸에서 세 마리의 파랑새가 날아올랐고 후에 남동생은 훌륭한 장수가 되어 나라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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